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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진단과 클리닉 강의

대담자세 한국인 vs. 중국인들... 한중 수교 막후활동 인사들의 경우... 張致赫 前 고합회장 등

 

 

 

대담자세 한국인 vs. 중국인들 [월간조선] 1409_156_1.jpg 201409 [韓中수교 22주년 특별기고] 숨은 주역 張致赫 前 고합회장이 털어놓은 비화, 덩샤오핑을 감격케 한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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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韓中수교 22주년 특별기고] 숨은 주역 張致赫 前 고합회장이 털어놓은 비화

덩샤오핑을 감격케 한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

 

 

월간조선 2014 9월호

정리 :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사진 : 徐炅利 月刊朝鮮 기자   

 

 

⊙ 세지마 류조의 권유 계기로 중국과 접촉 시작, 중국국제우호연락회 金黎 岳楓 鄧榕 등과 친분 구축
⊙ 1989년 톈안먼 사태 직후 朴哲彦 특사와 함께 訪中, “톈안먼 사태 진압 이해한다”는 盧泰愚 대통령의
    親書 전달
⊙ 시진핑, 덩샤오핑식 경제 우선·대외협조 노선으로 돌아갈 것
⊙ 美·中 사이에서 좌고우면하지 말고 동북아 5强 형성 비전 갖고 노력해야

 

 

張致赫

⊙ 79세. 서울대 법학과 수학. 단국대 법정대 졸업.
⊙ 고려합섬 회장, 고합그룹 회장, 전경련 부회장,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
    전경련 남북경협특별위원장, 대통령 비상경제자문위원 역임.
⊙ 상훈: 화랑무공훈장, 은탑산업훈장, 수교훈장 숭례장, 러시아 우호훈장 등.

 

 

 

  8월 24일은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지 22년이 되는 날이다. 수천 년간 긴밀한 관계였던 한중 양국은 냉전(冷戰)시대에 관계를 끊었다가 1992년 수교하면서 관계를 복원했다. 지난 22년을 돌아보면 감회가 새롭다. 수교 당시만 해도 선진국 문턱에 도달한 대한민국을 선망(羨望)의 눈으로 바라보던 중국은 이제 G2의 한 축(軸)으로 우뚝 섰다. 반면에 대한민국은 정치·경제적으로 한풀 기세가 꺾이고,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형국이다.
 
  나는 198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요인들과 교류하면서 한중수교 과정에서 작은 역할을 했다. 이제 그 이야기의 일부를 공개할까 한다. 새삼 옛날 이야기를 공개하는 것은 ‘지난날 내가 이런 큰일을 했노라’고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중수교 과정을 돌아보노라면 안갯속 같은 동북아(東北亞) 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의 나아갈 바를 모색하는 데 참고할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대한공론사 홍콩 주재원 시절
 
  나와 중국의 인연은 19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 홍콩 주재원이었다. 대한공론사는 영자지(英字紙) 《코리안 리퍼블릭(Korean Republic)》을 발간하던 공보처 산하 기관이었다. 홍콩 주재원은 나를 포함해 두 명이었는데, 《코리안 리퍼블릭》을 보급하고 기사를 쓰는 게 임무였다. 우리나라 언론사에서 해외 주재원을 둔 것은 그게 최초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만 해도 외국에서는 ‘코리아’라는 존재 자체가 희미하던 시절이었다. 홍콩에서도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코리아가 어디냐?”는 질문을 받기 일쑤였다. “얼마 전 전쟁을 치른 나라 있지 않으냐?”고 하면 그제서야 “아, 한국전쟁(Korean War)” 하면서 아는 체를 했다.
 
  당시 홍콩에는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신문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대공보(大公報)》였고, 다른 하나는 《문회보(文匯報)》였다. 전자(前者)는 정치, 후자(後者)는 경제에 밝았다. 《문회보》의 사장은 주(駐) 이집트 중국대사를 지낸 여성이었는데, 그녀의 남편이 《대공보》의 주필이었다. 부부가 홍콩의 언론계를 주름잡고 있었던 셈이다.
 
  먼저 접촉을 해 온 것은 중국측이었다. 《문회보》를 통해서였다. 그들은 《코리안 리퍼블릭》을 30부나 구독해 가더니, 이어 한국의 다른 신문들도 공급해 달라고 했다. 다른 국내 신문을 우리가 직접 그들에게 판매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한국 신문들을 들여다가 그들이 지정하는 홍콩 내 서점을 통해 공급해 주었다. 그 신문들은 《문회보》를 통해 베이징(北京)으로 갔을 것이다.
 
  《문회보》 관계자들과는 식사를 같이 하는 등 자주 만났다. 그들은 특별히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를 높이 평가하는 말을 많이 했던 게 기억난다. “저우 총리는 프랑스 유학을 한 엘리트지만 일본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 귀국한 분”이라고 했다. 그들은 “장 선생이 중국에 오면 언제든 저우 총리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말도 했다. 6・25 당시 국군 장교로 참전했던 나는 “이보시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중공군과 총을 겨누었던 사람인데 그게 가능하겠소?”라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냉전으로 중국과의 접촉이 단절되어 있던 시절, 홍콩에서의 경험은 내게 중국을 비롯한 세계를 보는 시야를 넓혀 주었다고 생각한다.
 
 
  세지마 류조의 권유로 중국측과 접촉
 
  이후 나는 1966년 고려합섬을 창업, 기업인의 길을 걸었다. 우리 회사는 일본의 이토추(伊藤忠)상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이토추상사는 우리나라 경제개발 초기에 큰 기여를 했다. 삼성이나 SK 등 굴지의 한국 기업들이 이토추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토추상사의 파트너는 간바야시(上林)라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소개로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부회장을 알게 되었다. 세지마 류조 부회장은 야마자키 도요코(山崎豊子)의 소설 《불모지대(不毛地帶)》의 주인공 이키 다다시의 모델로 유명한 인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본영(大本營) 작전참모로 태평양전쟁을 기획했고, 전후(戰後)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가 귀국한 후에는 이토추상사에 들어가 기업인으로 활약했다.
 
  세지마 류조 부회장과 친해진 나는 해마다 정초면 일본으로 건너가 그와 만났다. 때로는 “일본은 도대체 왜 미국에 대들었느냐?”며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면 그는 당시의 비화(秘話)들을 들려주곤 했다. 1960년대 후반인지, 1970년대 초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박정희(朴正熙) 정권 중반쯤 그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남을 주선해 준 적도 있다. 세상에서는 세지마 류조와 박정희 대통령의 인연이 박 대통령 집권 초기부터 시작한 걸로 아는데, 잘못된 얘기다.
 
  세지마 류조는 타고난 전략가(戰略家)였다. 국수주의(國粹主義)와도 거리가 멀었다. 아시아 전체를 보면서 아시아 각국이 서로 협력하면서 함께 번영하자는 꿈을 갖고 있었다. 1984년 경,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장 회장, 이제 한국도 중국과 접촉을 갖기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중국은 과거와 달라지고 있어요.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노선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본은 이미 1972년에 중국과 수교를 했습니다. 한국도 이 대열에 합류해야 합니다. 그러는 것이 남북통일을 위해서도 좋지 않겠습니까.”
 
  세지마 회장은 그렇게 권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토추상사의 중국통(中國通)인 후지노 실장을 소개해 주었다. 후지노 실장은 나를 중국국제우호연락회와 연결해 주었다.
 
 
  수수께끼의 사나이 金黎 부회장
 
1988년 4월 왕전 중국 국가부주석을 예방했다. 왼쪽부터 나, 왕전 부주석, 진리 국제우호연락회 상근부회장, 웨펑 부회장.
  중국국제우호연락회는 미(未)수교 국가와의 교류 등 외국과의 우호증진 활동을 펴는 ‘민간외교’ 담당 기구였다. 물론 공산주의 국가의 성격상 공산당의 관리하에 있는 단체였다. 이는 이 단체의 역대 회장단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왕전(王震) 당시 국가부주석, 황화(黃華) 전 외교부장 등 쟁쟁한 인사들이 명예회장을 지냈다. 덩샤오핑의 막내딸인 덩용(鄧榕), 중국 군부(軍部) 원로(元老) 예젠잉(葉劍英)의 아들 웨펑(岳楓) 등이 부회장으로 포진해 있었다.
 
  국제우호연락회에는 묘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옌안(延安) 시절에 마오쩌둥(毛澤東)의 비서를 지냈지만 그때부터 덩샤오핑의 숨은 직계였다는 인물이었다. 머리가 좋고 일본어가 유창했다. 그가 바로 국제우호연락회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진리(金黎) 상근 부회장이었다.
 
  1988년 1월 28일~2월 10일 나는 중국을 방문, 진리 상근부회장, 웨펑 부회장 등과 만났다. 그리고 그해 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진리 부회장 등이 한국을 방문했다. 일행 중에는 《문회보》의 기자도 있었는데, 30여 년 전 홍콩에서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진리 부회장 일행의 방한(訪韓) 명분은 서울올림픽 실태를 살펴본다는 것이었지만, 그들의 관심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 지하철, 공업단지(공단) 등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진리 부회장은 전북 군산(群山)에 무척 가 보고 싶어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당시 군산에 특별히 그들이 관심 있어 할 만한 게 없었기 때문에 군산 방문은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진 부회장이 그렇게 군산에 가 보고 싶어한 이유는 내게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 수수께끼가 어렴풋이나마 풀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진리 회장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주위 사람들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외국말을 토해 냈다고 한다. 바로 한국어였다. 나는 이를 근거로 그가 한국인이었다고 확신한다. 짐작이지만 그는 옌지(延吉), 룽징(龍井) 같은 곳에서 학업을 마친 후,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 후 마오쩌둥의 비서로, 덩샤오핑의 숨은 측근으로 활약했지만, 어떤 사정 때문에 자신이 한국인(조선족)이라는 사실을 감추어야 했던 것 아닐까. 나를 만날 때를 비롯해서 한국인들과 만날 때도 그는 주로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그가 1988년 방한했을 때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군산에 가 보고 싶어했던 것은 아마도 그곳이 선대(先代)의 고향이기 때문이 아닐는지….
 
  덩샤오핑은 진리의 보고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중수교의 기초공사가 이뤄진 셈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진리 부회장은 중국으로 돌아간 후 덩샤오핑에게 대한(對韓)정책과 관련된 종합보고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내가 사후에 들은 골자를 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한은 성공한 나라다.
 
  둘째, 박정희 대통령은 통제정치와 자유시장경제를 접목(接木)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사회주의 이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셋째, 남한은 이제 학생들의 데모나 지하 정치공작 같은 것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따라서 중국도 마땅히 남한과 수교하고, 남한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배워야 한다.
 
 
  톈안먼 사태를 ‘이해’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
 
  1989년 6월 중국에서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일어났다. 그로부터 얼마쯤 지났을 때, 박철언(朴哲彦) 대통령정책보좌관(그해 7월부터 정무장관)이 나를 찾아왔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인척인 그는 당시 북방외교를 총괄하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나를 알고 찾아왔는지는 모른다. 박 보좌관은 염돈재(廉燉載·전 국정원 1차장)씨와 함께 왔는데, 인상이 좋고 성실해 보였다. 박 보좌관이 말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親書)를 덩샤오핑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베이징 시장 등을 통해 루트를 만들어 보려 했지만 안 됐습니다. 회장님께서 중국측에 인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진리・웨펑 부회장을 통해 중국측에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친서인만큼 덩샤오핑이 직접 봤을 것이다. 그날 저녁 진리 부회장은 노 대통령의 친서 내용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에 의하면, 노 대통령은 친서에서 “톈안먼 사태 당시 군대를 동원해서 수습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의 특수한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대한민국의 친선국가들(미국, 일본 등을 의미)에게도 이러한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당시는 톈안먼 사태 유혈(流血)진압에 대한 국제적 비난여론이 높을 때였다. 미국 등 서방세계는 중국에 대한 경제제재에 들어갔고, 중국은 일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다. 그런 시기에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 정권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진리 부회장은 “외국의 정상(頂上)이 그런 입장을 밝힌 것은 노 대통령이 유일하다. 덩샤오핑이 친서를 접하고 감격해했다”고 말했다.
 
 
  덩샤오핑, 자오즈민과 안재형의 결혼 직접 허가
 
중국 국가대표 탁구선수를 지낸 자오즈민(오른쪽)은 1989년 10월 23일 안재형 선수와 함께 입국, 결혼을 발표했다.
  친서 전달 관련 임무가 끝난 후, 박철언 장관은 내게 다른 문제를 하나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바로 중국 국가대표 탁구선수 자오즈민(焦志敏)과 우리나라 국가대표 탁구선수 안재형(安宰亨) 두 사람의 결혼문제였다. 두 사람은 1984년 파키스탄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처음 만난 이후 사랑을 키워 오고 있었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이 맺어질지 여부는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중국과 국교(國交)가 없던 터라 두 사람의 결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시 탁구 국가대표였던 현정화 선수는 박철언 장관의 사촌처제였다. 현 선수는 박 장관에게 안재형과 자오즈민이 맺어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박 장관의 부탁을 받은 나는 진리 부회장에게 부탁했다. 진 부회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노력해 보겠다”고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진 부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덩샤오핑이 자오즈민의 결혼을 직접 승인했다는 소식이었다. 자오즈민이 출국(出國)하기 전 진리 부회장은 그녀를 불러서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너는 단순히 결혼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두 나라 간에 역사적 역할을 하기 위해 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자오즈민은 그해 10월 22일 안재형 선수와 함께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고, 그해 12월 23일 결혼식을 올렸다. 1989년에 내가 박철언 장관과 함께 중국을 방문해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자오즈민의 출국 약속을 받아낸 얘기는 이번에 처음 공개하는 것이다. 박철언 장관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도 이때의 이야기는 나와 있지 않다. 아마 대통령 친서 전달과 같은 민감한 얘기를 다 털어놓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박 장관은 한중수교 과정에서 나의 역할에 대해서는 회고록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朴哲彦의 회고
 
1990년 9월 박철언 장관과 함께 웨펑 중국국제우호연락회 부회장을 만났다. 왼쪽부터 웨펑 부회장, 나, 박철언 장관.
 < (1990년) 4월 26일 일본에 도착한 직후, 오후 2시에 진리 중국국제우호촉진협회(중국국제우호연락회-편집자 주) 부회장을 만났다. 당시 중국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 중이던 고려합섬그룹의 장치혁 회장이 적극 주선하였다. 진리 부회장은 장치혁 회장과 특별히 가까운 친분관계가 있는 듯했다. (중략)
 
  나는 진리 부회장과 조속한 한중관계 정상화를 위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극비를 전제로 두 가지를 제안했다. 9월에 열리는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노 대통령이 참석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는 것과 노 대통령이 참석할 경우, 아시아평화와 공동번영을 함께 토의할 수 있도록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이나 장쩌민(江澤民) 총서기와의 회담을 주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또 책임 있는 당국자와 이 두 가지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6, 7, 8월 중에 나의 중국 방문도 주선해 달라고 했다.
 
  진리 부회장은 “중국방문은 환영합니다. (중략) 나는 최고위층과는 즉각 연결되는 관계이며, 이 제의도 즉각 보고하겠습니다. 5월 중에 장치혁 회장이 중국을 방문할 때 1차적인 의견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 1990년 6월 10일, 12시30분부터 2시30분까지 신라호텔 1521호에서 서동권 안기부장을 만났다. (중략)
 
  나는 “(전략) 각하의 특별한 지시도 있고 해서, 각하의 베이징 방문과 정상회담의 추진은 이미 진리-장치혁 회장, 리루이환(李瑞環) 정치국 상무위원, 차오스(喬石) 전인대 상무위원장·첸차우 변호사, 이병호 변호사 라인을 통해 집요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 (1990년) 9월 23일 중국국제우호촉진협회의 진리 부회장과 웨펑 부회장을 만났다. (중략) 나는 “톈지윈 부총리가 선경그룹의 이순석 사장을 통해 우리 부에 알려온 바에 의하면, 중국국제우호촉진협회와 선경이 통로가 되고, 나와 장치혁 회장이 우호촉진협회와 관계를 가지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겁니다. 두 개의 통로뿐입니다”라고 정리해 주었다. (중략) 그러자 진리, 웨펑 두 사람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통로가 너무 많아 곤란합니다. 더 이상의 통로는 필요 없다고 노 대통령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우리와 박 장관이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이순석, 장치혁 두 통로만 인정하겠습니다. 상부에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접촉 라인의 정리를 부탁했다.>
 
 
  톈지윈 부총리, 92년 1월 韓中수교 의사 밝혀
 
1992년 1월 만난 톈지윈 중국 부총리(오른쪽)는 내게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1991년이 되자 중국측 인사들로부터 “내년에는 한중수교가 꼭 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얘기를 우리나라 관계 요로에 전달했지만, 어느 누구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안기부(현 국정원)의 국장은 “한중수교는 아직 요원한 일이니, 함부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1992년 1월 23일 웨펑 부회장이 톈지윈(田紀雲) 부총리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이 자리에서 톈 부총리는 “중국 정부는 한국과 수교하기로 결심했다”면서 “이제부터는 정부 간 접촉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나는 이 사실을 개인 채널을 통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정부에서조차 이런 상황을 못미더워했다. 안기부 한 모 국장은 “아니다. 한중수교를 하더라도 1년은 지나야 가능할 것이다”라고 했다.
 
  한중 양국 간 수교논의를 진행하는 동안 중국은 국내외에서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북한에 대해서는 중국이 일방적으로 통고하는 수준이었다. 내가 중국측 관계자들에게 “북한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고 물으면, 그들은 “덩샤오핑과 김일성 주석은 서로 존경하는 사이다. 김 주석을 설득할 수 있다”면서 “한국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곤 했다.
 
  친북(親北) 성향이 강한 중국 군부를 설득하는 일은 국제우호연락회 명예회장을 지낸 왕전 국가부주석이 맡았다. 당시 중국 군부 내에는 산둥(山東)성 인맥(人脈)이 주류(主流)였는데, 왕 부주석이 바로 그들의 대부(代父)였기 때문이다.
 
  수교과정에서 중국측이 우리나라에 요구한 것은 대만(臺灣)과의 단교(斷交)와, 서울 명동에 있는 주한 대만대사관 건물의 양도 문제였다.
 
  드디어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가 이루어졌다. 여기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중수교가 덩샤오핑이 1988년 이후 한국과 수교한다는 기본노선을 설정하고, 철저한 계획과 검토를 거친 끝에 성사되었다는 사실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진리 부회장 일행이 방한한 것은 그러한 작업의 출발점이었다.
 
  한중수교에 열심이었던 것은 한국보다는 중국이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중수교를 성사시킨 것 또한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노 대통령을 보좌했던 외교안보 라인도 훌륭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한중수교 과정에서 나의 수고를 인정해, 한중수교 후인 1992년 11월 내게 수교훈장 숭례장(崇禮章)을 수여했다.
 
  중국측에서도 한중수교 과정에서 내 역할을 기억해 주고 있다. 덩용 부회장은 2001년 7월 19일 내게 보내온 편지에서 <장 회장님은 선견지명이 탁월하신 분으로, 한중수교 당시에도 노고를 마다않고 전심전력을 다하셨습니다. 장 회장님의 이런 위대한 공적을 중국 인민들은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덩샤오핑, “한국식 모델이 중국 현실에 적합”
 
1992년 9월, 중국 외교의 거두 황화 전 외교부장과 함께. 황 전 부장은 중국국제우호연락회 명예회장을 지냈다.
  1990년대 내내 한국 등으로부터 경제발전에 필요한 노하우를 배우는 데 주력했다. 나는 생전에 덩샤오핑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국의 지인(知人)들을 통해 그가 평소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하곤 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당시 나의 메모를 토대로 옮겨 본다.
 
  첫째, 미국·일본의 제도는 중국의 사정에 맞지 않는다. 중국의 경우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은 ‘정치의 경제화’에 성공했던 한국의 사례다. 우리는 한국식 모델을 택해야 한다.
 
  둘째, 공산주의는 인류가 잘하면 300~400년 후에나 실현될 수 있다. (간접적으로 공산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부정한 것이다.)
 
  셋째,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 당시 리스린(李士林) 소장 등이 무력(武力)으로 집권하자는 건의를 한 적이 있으나, “중국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무력으로 집권하면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전쟁이 터져 중국은 내전(內戰)상태에 빠질 것이다”라고 반대했다. 덩샤오핑이 군부의 정치적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때 이러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제3세계 개발도상국가에서 보는 것과 같은 군사독재는 중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넷째, 따라서 중국은 공산당이 영도하는 전체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경제를 결합한 체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다.
 
  다섯째, 경제는 평화를 만드는 도구이다. 진정한 평화를 만드는 것은 바로 경제이다. 그러니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부강해져야 한다.
 
  여섯째, 중국 국민은 미국으로부터 앞으로 70년간은 경제운영 기법 등에 대해 배워야 한다. 중국은 주한미군 문제나 한미관계에 개입할 생각이 없다. 한반도 통일 이후 한국은 중립국이 될 수 있겠지만, 그때에도 동북아 안정을 위해 미군의 계속 주둔은 필요하다.
 
  나는 덩샤오핑의 이러한 견해를 ‘위대한 덩샤오핑 노선’이라고 부른다. ‘덩샤오핑 노선’ 가운데 상당 부분은 1988년 방한했던 진리 부회장의 보고서 내용과 통한다. 덩샤오핑은 진리 부회장의 건의를 전적으로 수용했던 것이다. 덩샤오핑은 특히 한국식 발전모델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중국공산당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소책자를 제작해 당과 정부의 국장급 이상 간부들에게 배포하고 네 번 이상 읽도록 했다고 한다.
 
  오늘날 중국의 성공은 덩샤오핑 노선, 특히 그가 채택한 박정희식 모델의 성공이다. 중국 경제발전 과정에서 동남아(東南亞) 화교(華僑)의 대중(對中) 투자와 싱가포르·홍콩에서 선진적인 무역·금융제도를 배워 온 것도 도움이 되었으나, ‘정치의 경제화’라는 한국의 교훈은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덩샤오핑의 이런 노선으로 볼 때, 그가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무력으로 사태를 수습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였던 자오즈양(趙紫陽)은 서구식 민주주의의 도입에 호의적이었지만, 덩샤오핑으로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덩샤오핑은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준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가 무척이나 고마웠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 베이징에 가 보면, 톈안먼에는 여전히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다. 이는 중국이 여전히 공산당이 영도하는 전체주의와 시장경제의 혼합체제를 유지할 것임을 보여준다. 덩샤오핑 노선은 의연히 살아 있는 것이다.
 
 
  中, 94년 장쩌민 보내 김일성에 남북정상회담 설득
 
덩용 여사가 내게 보내온 편지. 한중수교 과정에서 나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덩샤오핑은 북한에 개혁·개방을 촉구했다. 덩용에 의하면, 1994년 제1차 북핵(北核)위기 당시에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북한으로 보내서 남북정상회담을 하도록 김일성을 설득했고, 김일성도 이에 동의했다고 한다. 비록 김일성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1993년 남북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는 미국(지미 카터 전 대통령)뿐 아니라 중국도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김영삼 정부는 내게 덩용을 통해 덩샤오핑과의 회담을 성사시켜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남북관계 개선에 중국이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힘써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덩용은 덩샤오핑과 회담에 대해서는 “아버지는 외빈 접견을 안 한 지 이미 2년이 지났으며, 김일성 주석도 불가(不可)하다”고 했다. 남북관계 개선에 중국이 역할을 하는 데 대해서는 그러한 뜻을 덩샤오핑이 장쩌민을 보내 김일성에게 전달했다면서 “중국은 한국 정부와 북한 정부 모두와 좋은 친구이다. 중국은 (양쪽 모두를 설득하기에) 위치가 좋다”고 했다.
 
  덩용은 덩샤오핑과 장쩌민에 대해 얘기해 주기도 했다. “원래 아버지에게는 세 개의 카드가 있었다. 첫째가 후야오방(胡耀邦), 둘째가 자오즈양, 셋째가 장쩌민이었는데, 앞의 두 카드를 다 써 버리는 바람에 장쩌민을 쓰게 된 것이다”라는 얘기였다.
 
 
  “中, 덩샤오핑 노선으로 복귀할 것”
 
2000년 7월 덩샤오핑의 딸 덩용 여사와 함께.
  한중수교 이후 22년 동안 중국이 남북한 관계개선에 얼마나 유익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는 중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방조한 것이 아니냐, 중국은 왜 북한정권을 지탱해 주고 있느냐 하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아울러 중국의 국력이 급속히 커 가면서 중국은 대외(對外)관계에서 점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덩샤오핑이 얘기했던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시대는 갔고, 이제 ‘유소작위(有所作爲)’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중국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작지 않다. 얼마 전에 만난 한 중국측 인사는 “무능한 지도자는 아랫사람에게 흔들린다”고 했다. “무슨 얘기냐”고 물었더니 “지난 13년 동안 북한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괴물을 만들었다. 오늘날처럼 날뛰는 이상한 나라 북한을 만든 것은 과거 중국 지도부였다”고 개탄했다. 그의 말은 후진타오(胡錦濤) 정권 10년과 덩샤오핑 사후(死後) 3년 동안 중국의 대북(對北)정책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로 나에게 들렸다. 그는 “시진핑(習近平)은 훌륭한 지도자”라면서 “시진핑은 덩샤오핑 노선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단언했다. 여기서 ‘덩샤오핑 노선’이란 멀리 저우언라이-류샤오치(劉少奇)-후야오방-황화로 이어지는 경제중시-온건외교 노선을 말한다. 그는 중국이 대외정책에서 균형을 잡는 시대로 돌아갈 것이며, 남북한에 대한 정책도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원래 덩샤오핑·류샤오치 등은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참전을 반대했다. 덩샤오핑은 스탈린의 요구로 마오쩌둥이 한국전 참전을 주장한 결과 수많은 중공군이 전사하고 수 십 년간 중국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았다.
 
  한국전쟁 때 중국이 먼저 휴전을 제안한 것이나 중국이 미국과의 수교를 꾸준히 갈망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잘 관찰할 필요가 있다. 특히 황화는 주 유엔대사로 있으면서 키신저와 상통(相通)하여 닉슨-마오쩌둥 회담을 성사시킨 바 있다. 덩샤오핑·황화 등은 이렇게 오래전부터 개방과 세계화를 추진했던 것이다. 한중수교도 그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고 중국이 당장 북한 김정은 정권을 고사(枯死)시키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북한에 공급하는 기름을 조금씩 줄여 나가면서 서서히 북한의 목을 조일 것이다. 북한을 목졸라 죽이는 수순까지 가지는 않겠지만, 북한이 말을 듣게 풀기도 하고 조이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중국식’으로 말이다.
 
  물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덩샤오핑 시대의 외교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을 수도 있다. 미국의 패권주의(覇權主義)와 중국의 중화주의(中華主義)가 공존할 수 있을지도 아직은 미지수다. 하지만 나는 중국이 균형을 잡는 시대로 돌아갈 것이라는 주장에 기대를 걸어 본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세계화(世界化)’에서 찾고 싶다. 지금 세계는 ‘경제 우선’의 시대이다. ‘정치의 경제화(經濟化)’가 지금 세계의 추세다.
 
 
  대한민국, 동북아 5强으로 나아가는 길
 
  그런 관점에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대한민국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좌고우면(左顧右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너무 머리를 써서, 두 나라 중 이리 붙을까 저리 붙을까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좋을 게 없다. 강대국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망한 대한제국을 상기하자.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중국경제는 우리가 잘만 활용하면 역사상 유례 없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장기적으로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할 것이다. 비록 북한이 지금은 개혁·개방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의 개혁·개방은 결국은 남북통일로 이어질 것이다. 내가 1980년대에 한중관계 개선을 위해 열심히 뛴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한미동맹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안보를 위해 한미동맹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우리가 한미동맹을 고집하면 중국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 하는 걱정은 부질없는 것이다. 우리는 의연히 우리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덩샤오핑 계열의 중국 지도자들도 이런 우리 입장을 십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은 더 큰 꿈을 꿔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 주변 4강(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북아 5강의 하나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동북아 4강을 넘어서 5강을 만드는 것만이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힘이다. 나는 김영삼 정권 시절 <동북아 4강 시대 소멸과 5강의 형성>이라는 제목의 의견서를 낸 적도 있다.
 
  5강체제 구축으로 가는 길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우리 내부의 분열이다. 남북간, 동서간, 남녀간, 세대간 갈등을 극복해야 한다. 지금처럼 갈등하고 대립해서는 지금까지 어렵게 일군 것들마저 다 잃어버릴 수 있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이나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이 독립정신을 얘기할 때 가장 강조한 것도 화합과 단결이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국가리더십이다. 영화 <명량>이 개봉 12일 만에 관람객 수 1000만명을 돌파했다.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서 왜 그렇게 많은 관객들이 몰렸을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국민들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기리는 것은 국민들이 그만큼 비전을 가진 리더십의 부재(不在)와 국가위기를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글로벌 경쟁시대다. 우리는 비록 중국처럼 땅덩어리가 크지 않고, 인구도 많지 않지만, 우리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얼마든지 있다. 이제 R&D(연구개발)를 넘어 C&D(Connect & Development)의 시대다. 이미 우리는 ICT(정보통신기술) 경영에서 역량을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더해 통일, 유라시아 개발, 해양진출 등은 대한민국에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세계는 중국보다 더 넓다.
 
  동북아 5강 형성을 국가적 비전으로 세우고, 스스로 살아날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이다. 내가 새삼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도 바로 이를 위해서이다.⊙